아서 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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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서 애시는 1943년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태어난 미국의 테니스 선수이자 시민 운동가였다. 그는 윔블던, US 오픈, 오스트레일리아 오픈에서 우승하며 그랜드 슬램 단식 3회 우승을 달성한 유일한 흑인 남자 선수이며, 1968년부터 1970년까지 3년 연속 데이비스컵에서 미국을 승리로 이끌었다. 은퇴 후에는 에이즈 퇴치를 위한 재단을 설립하고, 시민 운동에 참여했으며, 'A Hard Road to Glory' 등 저술 활동을 펼쳤다. 1993년 에이즈 관련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아서 애시 스타디움, 아서 애시 용기상 등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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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애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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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아서 애시 |
전체 이름 | 아서 로버트 애시 주니어 |
국적 | 미국 |
출생지 | 리치먼드, 미국 |
출생일 | 1943년 7월 10일 |
사망지 | 뉴욕, 미국 |
사망일 | 1993년 2월 6일 |
키 | 185.9cm |
몸무게 | 72.5kg |
사용하는 손 | 오른손잡이 (한손 백핸드) |
선수 경력 | |
프로 데뷔 | 1969년 |
은퇴 | 1980년 |
아마추어 투어 시작 | 1959년 |
상금 및 랭킹 | |
통산 상금 | $1,584,909 (ATP) |
단식 최고 랭킹 | 2위 (1976년 5월 10일) |
복식 최고 랭킹 | 15위 (1977년 8월 30일) |
단식 기록 | |
통산 전적 | 1188승 371패 (오픈 시대 이전 및 오픈 시대 포함) |
통산 타이틀 | 87개 (ATP 기준 오픈 시대 44개 타이틀) |
그랜드 슬램 단식 | |
오스트레일리아 오픈 | 우승 (1970년) |
프랑스 오픈 | 8강 (1970년, 1971년) |
윔블던 | 우승 (1975년) |
US 오픈 | 우승 (1968년) |
기타 토너먼트 | |
마스터스 컵 | 준우승 (1978년) |
월드 챔피언십 테니스 결승 | 우승 (1975년) |
복식 기록 | |
통산 전적 | 323승 176패 |
통산 타이틀 | 18개 (그랑프리 및 WCT 타이틀 14개) |
그랜드 슬램 복식 | |
오스트레일리아 오픈 | 우승 (1977년) |
프랑스 오픈 | 우승 (1971년) |
윔블던 | 준우승 (1971년) |
US 오픈 | 준우승 (1968년) |
팀 경기 | |
데이비스 컵 | 우승 (1963년, 1968년, 1969년, 1970년) |
명예의 전당 | |
입성 년도 | 1985년 |
명예의 전당 ID | arthur-ashe |
2. 어린 시절과 테니스 입문
아서 애시(Arthur Ashe)는 1943년 7월 10일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태어났다.[10] 어린 시절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공원 관리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13][10] 집 근처 흑인 전용 공원인 브룩필드 공원에서 7살 때 테니스를 처음 접했다. 당시 리치먼드 최고의 흑인 테니스 선수였던 론 채리티(Ron Charity)에게 기본기를 배웠고, 이후 알테어 깁슨(Althea Gibson)의 코치이기도 했던 로버트 월터 존슨 박사를 만나 체계적인 지도를 받으며 선수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존슨 박사는 애시에게 테니스 기술뿐만 아니라 스포츠맨십과 에티켓, 침착함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하지만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은 애시의 선수 생활에 큰 장벽이었다. 고향 리치먼드에서는 백인 청소년들과의 경쟁이 금지되었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좋은 시설인 실내 코트를 사용할 수 없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 나은 환경에서 훈련하기 위해, 애시는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세인트루이스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곳에서 리처드 허들린(Richard Hudlin)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훈련에 매진했고,[14] 1961년에는 인종 차별의 벽을 넘어 미국 고교 선수권 대회(U.S. Interscholastic tournament)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또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전국 주니어 실내 테니스 타이틀을 획득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초기 경력은 그가 훗날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로 성장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2. 1. 인종 차별과 성장 배경
아서 애시(Arthur Ashe)는 1943년 7월 10일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아서 애시 시니어와 매티 코델 커닝햄 애시 사이에서 태어났다.[10] 그에게는 5살 어린 남동생 조니가 있었다.[10] 애시 가문은 1735년 '더 도딩턴'이라는 배를 타고 미국으로 끌려온 서아프리카 출신 노예 여성 아마르의 직계 후손이었다.[11] 그의 조상들은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였던 새뮤얼 애시에게 노예로 팔린 역사를 가지고 있다.[12]1950년 3월, 애시가 6살 때 어머니 매티는 당시 독혈증으로 불렸던 자간전증 합병증으로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13] 이후 애시와 남동생은 리치먼드 공원 관리국에서 수리공, 관리인, 특별 경찰관으로 일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10] 아버지는 자상하면서도 엄격했으며, 애시가 학업과 스포츠 모두에서 뛰어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들의 체격이 약했기 때문에 당시 인기 있던 미식축구는 하지 못하게 했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 애시의 별명은 "스키니(Skinny)" 또는 "본즈(Bones)"였다. 애시 가족은 리치먼드에서 가장 큰 흑인 전용 공원이었던 18에이커 규모의 브룩필드 공원 내 관리인 숙소에서 살았는데, 이곳에는 농구장, 4개의 테니스 코트, 수영장, 3개의 야구장이 있었다. 애시는 7살 때 집 근처 코트에서 테니스를 처음 접했고, 당시 리치먼드 최고의 흑인 테니스 선수이자 버지니아 유니온 대학교 학생이었던 론 채리티(Ron Charity)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기본 기술을 가르치며 지역 대회 참가를 독려했다.
매기 L. 워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테니스를 계속하던 애시는 론 채리티의 소개로 알테어 깁슨의 코치였던 로버트 월터 존슨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존슨 박사는 미국 테니스 협회(ATA)의 주니어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애시는 10세였던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존슨 박사의 여름 테니스 캠프에서 지도와 훈련을 받았다. 존슨 박사는 애시의 기술을 다듬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스포츠맨십, 에티켓, 그리고 훗날 애시의 상징이 된 침착함을 통해 인종 사회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라인에서 2인치 이내에 떨어진 공은 무조건 넘기고, 심판의 판정에 절대 항의하지 않도록 가르쳤다. 1958년, 애시는 메릴랜드 주 소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가 되었으며, 이는 그가 처음으로 경험한 인종 통합 테니스 경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1960년, 인종차별이 심했던 리치먼드에서는 백인 청소년들과의 경쟁이 금지되었고, 흑인 선수에게 개방되지 않은 실내 코트를 사용할 수 없었다. 이때 존슨 박사의 친구이자 세인트루이스의 테니스 코치였던 리처드 허들린의 제안을 받아들여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했고, 서머 고등학교에서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보냈다.[14] 세인트루이스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었다. 애시는 1년간 허들린 가족과 함께 살면서 훈련을 받았고, 허들린 코치는 애시의 강해진 체격을 활용하여 서브 앤 발리 스타일을 개발하도록 도왔다. 애시는 주 방위군 무기고의 실내 코트에서 연습할 수 있었고, 1961년에는 존슨 박사의 노력 덕분에 이전까지 인종 차별적이었던 미국 고교 선수권 대회(U.S. Interscholastic tournament)에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애시는 1960년 12월과 1963년에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군중 속의 얼굴들(Faces in the Crowd)" 코너에 소개되었으며,[15] 전국 주니어 실내 테니스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가 되었다. 이처럼 애시는 10세 때 만난 로버트 월터 존슨 박사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학업과 테니스 양면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2. 2. 학창 시절과 훈련
애시는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있는 매기 L. 워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테니스 연습을 계속했다. 당시 리치먼드 최고의 흑인 테니스 선수이자 버지니아 유니온 대학교 학생이었던 론 채리티(Ron Charity)는 애시의 재능을 발견하고 기본적인 스트로크를 가르쳤으며, 그를 로버트 월터 존슨 박사에게 소개했다. 존슨 박사는 알테어 깁슨의 코치이기도 했으며, 미국 테니스 협회(ATA)의 주니어 개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애시는 10세 때인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존슨 박사의 여름 테니스 캠프에서 지도와 훈련을 받았다. 존슨 박사는 애시의 기술을 다듬는 것 외에도, 스포츠맨십, 에티켓, 그리고 훗날 애시의 특징이 된 침착함을 통해 인종적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racial socialization)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1958년, 애시는 메릴랜드주 소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가 되었으며, 이는 그가 처음으로 인종 통합된 환경에서 치른 경기이기도 했다.하지만 1960년, 애시는 인종 차별이 심했던 리치먼드에서 백인 청소년들과의 경쟁이 금지되었고, 흑인 선수에게 개방되지 않은 도시의 실내 코트 사용도 불가능해지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그는 존슨 박사의 친구이자 세인트루이스의 테니스 코치였던 리처드 허들린(Richard Hudlin)의 제안을 받아들여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했고, 섬너 고등학교[14]에서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보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애시는 보다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얻었으며, 1년 동안 허들린 코치 및 그의 가족과 함께 지내며 훈련에 매진했다. 허들린 코치는 애시의 강해진 신체 조건을 활용하여 서브 앤 발리(serve-and-volley) 스타일의 게임을 개발하도록 지도했다. 애시는 주 방위군 무기고의 실내 코트에서 연습했으며, 1961년에는 존슨 박사의 도움으로 이전까지 인종 차별로 참가할 수 없었던 미국 고교 선수권 대회(U.S. Interscholastic tournament)에 출전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1960년 12월과 1963년에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주목할 만한 인물(Faces in the Crowd)" 코너에 소개되었으며,[15]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전국 주니어 실내 테니스 타이틀을 획득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이후 전미 대학 체육 협회(NCAA) 테니스 선수권 대회 단식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3. 대학 시절과 군 복무
애시는 1963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UCLA)에서 테니스 장학금을 받았다. UCLA 재학 중에는 J. D. 모건의 지도를 받았으며, 근처에 살던 그의 스포츠 우상인 판초 곤잘레스와 정기적으로 연습하며 기량을 키웠다. 또한 학군단(ROTC)의 일원으로 활동했는데, 이는 학비를 지원받는 대신 졸업 후 현역 복무를 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그는 카파 알파 프사이 프래터니티 웁실론 지부에도 가입하여 회원이 되었다.
경영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애시는 1966년 8월 4일 미국 육군에 입대했다. 그는 워싱턴에서 기초 군사 훈련을 마쳤고, 이후 행정 장교단의 소위로 임관되었다. 그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 배속되어 데이터 처리 담당자로 근무했으며, 웨스트포인트 재직 시절 사관학교 테니스 프로그램을 이끌기도 했다. 1968년 2월 23일 중위로 진급했고, 1969년 2월 22일 중위 계급으로 명예 제대했다. 그는 군 복무에 대한 공로로 국가방위근무훈장을 받았다.[16][17]
4. 테니스 선수 경력
아서 애시(Arthur Ashe)는 어린 시절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월터 존슨(Robert Walter Johnson) 박사의 지도를 받으며 테니스 선수로 성장했다. 미국의 시민권 운동 시기에 대학 대회 우승 및 전미 대학 체육 협회(NCAA) 단식 우승 등 두각을 나타냈고, 1963년에는 흑인 선수 최초로 데이비스컵 미국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1968년 US 오픈에서 우승하며 남자 테니스 선수 최초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흑인 선수가 되었다. 이후 1970년 오스트레일리아 오픈과 1975년 윔블던 선수권 대회에서도 정상에 오르며 통산 3차례 그랜드 슬램 단식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1975년 윔블던 결승에서는 당시 최강자였던 지미 코너스를 꺾으며 큰 주목을 받았다. 애시는 선수 시절 내내 젠틀맨다운 매너와 스포츠맨십을 지켰으며, 성실한 인품으로 테니스계의 깊은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심장 질환으로 인해 1979년 심장마비를 겪은 뒤 1980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의 통산 전적은 818승 260패, 51개의 타이틀 획득이다. 은퇴 후에는 데이비스컵 미국 팀 감독(1981년~1985년)을 역임하고, 미국 테니스 협회의 주니어 육성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테니스 발전에 기여했다. 1985년에는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6]
right의 센터 코트인 아서 애시 스타디움. 그의 업적을 기려 명명되었다.]]
1997년 US 오픈의 새로운 센터 코트는 그의 공적을 기려 '아서 애시 스타디움(Arthur Ashe Stadium)'으로 명명되었으며, 이는 세계 최대 규모의 테니스 전용 경기장이다.
4. 1. 1960년대: 초기 경력과 데이비스컵 활약
아서 애시는 1961년 동부 클레이 코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며 초기 경력을 시작했다. 1963년에는 태평양 남서부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고, 같은 해 미국 데이비스컵 팀에 발탁되어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되는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이는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인종 차별의 벽을 넘어서는 의미 있는 성과였다. 1964년에는 동부 그래스 코트 선수권 대회에서도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1965년, 애시는 미국 랭킹 3위에 오르며 전미 대학 체육 협회 (NCAA) 단식 타이틀과 복식 타이틀을 모두 획득했고, 소속 대학인 UCLA가 NCAA 단체 테니스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66년과 1967년에는 호주 선수권 대회 결승에 연속으로 진출했으나, 두 번 모두 로이 엠머슨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하지만 1967년에는 미국 남자 클레이 코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68년은 애시에게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는 미국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데 이어, 오픈 시대가 시작된 첫 해의 US 오픈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이 우승으로 애시는 US 오픈 최초의 흑인 남성 챔피언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아마추어 대회와 오픈 대회를 모두 제패한 역사상 유일한 선수로 기록되었다.[18] 그러나 데이비스컵 출전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아마추어 신분을 지켜야 했던 애시는 US 오픈 우승 상금 1.4만달러를 받을 수 없었고, 상금은 준우승자인 톰 오커에게 돌아갔다. 애시는 이 역사적인 우승에 대해 하루 20USD의 경비만을 지급받았다.[19] 그의 대회 참가는 베트남 전쟁 복무 중이던 동생 존니가 형을 대신해 추가 복무를 자원했기에 가능했다.[20] 같은 해 12월, 애시는 애들레이드에서 열린 데이비스컵 결승에서 호주를 꺾고 미국 팀의 우승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해 데이비스컵 단식 12경기에서 그의 유일한 패배는 이미 미국의 우승이 확정된 후 치러진 의미 없는 경기였다. 애시는 1968년 시즌 동안 참가한 22개 대회 중 10개에서 우승하며 72승 10패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1969년 9월, 미국 데이비스컵 팀은 결승에서 루마니아를 물리치고 대회 2연패를 달성했으며, 애시는 단식 두 경기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같은 해, 애시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극단적인 인종차별 정책을 시행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로부터 남아프리카 공개 선수권 대회 출전을 위한 비자 발급을 거부당했다. 이 사건은 애시가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 2. 1970년대: 전성기와 그랜드 슬램 우승
1970년 1월, 아서 애시는 오스트레일리아 오픈에서 두 번째 그랜드 슬램 단식 타이틀을 획득했다. 당시 일부 세계적인 프로 선수들이 재정적 보장을 이유로 내셔널 테니스 리그의 참가가 금지되어 대회 규모가 다소 축소된 상황이었으나, 애시는 결승에서 딕 크리리를 세트 스코어 3-0으로 꺾고 1959년 이후 최초로 호주 출신이 아닌 우승자가 되었다.같은 해 3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애시에게 비자 발급을 거부한 사건을 계기로, 인종차별 정책을 이유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데이비스 컵 대회에서 제명되었다. 9월에는 미국 데이비스컵팀이 서독을 꺾고 3연패를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애시는 라마르 헌트(Lamar Hunt)의 월드 챔피언십 테니스(World Championship Tennis, WCT)와 5년 계약을 맺고 프로 선수로 전향했다.[21]
1971년 3월, 애시는 다시 한번 오스트레일리아 오픈 결승에 진출했지만 켄 로즈월에게 패배했다. 같은 해 6월에는 파트너 마티 리센과 함께 프랑스 오픈 남자 복식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72년, 국제 테니스 연맹(ILTF)과 WCT 간의 분쟁으로 인해 WCT 소속 선수였던 애시는 1월부터 7월까지 ILTF 그랑프리 테니스 서킷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오픈과 윔블던 출전이 무산되었다. 9월에는 US 오픈 결승에 진출했으나, 일리에 너스타세에게 5세트 접전 끝에 아쉽게 패배했다. 이 패배는 애시의 프로 경력에서 가장 큰 실망 중 하나로 남았다. 시상식에서 그는 너스타세의 경기 중 행동에 불만을 표하면서도 그의 실력을 인정하며 코트 매너 개선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애시는 이 시기, 남자 테니스 프로 선수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테니스 선수 협회(ATP) 설립을 강력히 지지했으며, 1974년에는 ATP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73년 6월, 애시는 ATP의 결정에 따라 윔블던 대회 보이콧에 동참했다. 이는 유고슬라비아의 니키 필리치가 데이비스컵 출전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ILTF로부터 출전 정지 처분을 받은 것에 대한 항의였다. ATP 이사회 멤버였던 애시는 보이콧에 찬성표를 던졌고, 이 결정은 ATP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22]
1973년 11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가 올림픽 금지 해제를 시도하면서 애시는 마침내 남아프리카 공화국 오픈 참가 비자를 발급받았다. 그는 단식 결승에서 지미 코너스에게 패했지만, 파트너 톰 오커와 함께 복식 우승을 차지했다. 애시는 자신의 참가가 아파르트헤이트의 고정관념을 깨고 통합의 중요성을 보여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1977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차별적인 경험을 한 후, 그는 다시 남아프리카 공화국 선수들의 국제 대회 보이콧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프로 테니스 서킷 및 데이비스컵 제명을 요구했다.[23]
1975년 5월, 애시는 댈러스에서 열린 시즌 최종 챔피언십 WCT 파이널에서 비외른 보리를 꺾고 우승했다. 같은 해 7월 5일, 윔블던 결승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이자 디펜딩 챔피언인 지미 코너스를 4세트 만에 꺾고 생애 첫 윔블던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는 1947년 이후 처음으로 미국 선수끼리 맞붙은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이었다.[24][25] 당시 애시와 코너스는 코너스가 ATP 회장이었던 애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등으로 인해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다. 애시는 결승전 내내 미국을 상징하는 색상의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시상식에서는 미국 데이비스컵 대표팀 재킷을 입어 애국심을 드러냈다. 우승 상금은 1만 파운드(1975년 기준 2.3만달러)였다. 결승 직후 코너스는 애시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을 취하했다.
1977년 1월, 애시는 토니 로치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오픈 복식에서 우승했지만, 한 달 후 발뒤꿈치 부상으로 수술을 받고 장기간 재활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세계 랭킹이 257위까지 떨어졌으나, 다음 해 35세의 나이로 세계 13위까지 복귀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1979년 7월, 뉴욕에서 테니스 클리닉을 진행하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건강한 운동선수였던 그의 발병은 심장 질환의 유전적 요인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같은 해 12월, 그는 네 개의 혈관에 대한 관상동맥 우회 수술을 받았다.[32] 이 심장 문제는 결국 1980년 4월, 36세의 나이로 공식 은퇴를 선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통산 전적은 818승 260패, 51개의 타이틀이다.
4. 3. 주요 대회 우승 기록
- 오스트레일리아 오픈 남자 단식: 1회 우승 (1970년), 준우승 3회 (1966년, 1967년, 1971년) / 남자 복식: 1회 우승 (1977년 1월)
- 프랑스 오픈 남자 복식: 1회 우승 (1971년)
- 윔블던 남자 단식: 1회 우승 (1975년)
- US 오픈 남자 단식: 1회 우승 (1968년), 준우승 1회 (1972년)
'''그랜드 슬램 단식 결승 결과'''
년 | 대회 | 상대 선수 | 경기 결과 |
---|---|---|---|
1968년 | US 오픈 | 톰 오커 | 14-12, 5-7, 6-3, 3-6, 6-3 |
1970년 | 오스트레일리아 오픈 | 딕 크리리 | 6-4, 9-7, 6-2 |
1975년 | 윔블던 | 지미 코너스 | 6-1, 6-1, 5-7, 6-4 |
5. 은퇴 이후 활동과 사회 운동
은퇴 후 애시는 선수 시절 못지않게 다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타임''과 ''워싱턴 포스트''에 글을 기고하고, ABC 스포츠와 HBO에서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전국 주니어 테니스 리그를 설립하고 미국 데이비스컵 팀 주장을 맡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5년에는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6]
그는 또한 적극적인 시민권 운동가로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과 아이티 난민 인권 문제에 목소리를 내며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선수의 역사를 다룬 ''A Hard Road to Glory'' (1988)와 회고록 ''데이스 오브 그레이스'' (1993)를 출간하며 작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27][29]
HIV 감염 사실을 공개한 후에는 에이즈 퇴치를 위한 재단을 설립하고 성교육과 안전한 성관계의 중요성을 알리는 등 인식 개선 운동에 헌신했다.[33] 세계 에이즈의 날에는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며 국제 사회의 관심과 지원을 촉구하기도 했다. 사망 직전까지도 도시 보건 연구소를 설립하고 회고록 집필을 마무리하는 등 사회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으며,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올해의 스포츠맨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5. 1. 사회 운동 참여
애시는 활발한 시민권 운동가였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통합 접근과 정치적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 방문한 31명의 저명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표단의 일원이었다.[26] 1985년 1월 11일, 워싱턴 D.C. 주재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관 밖에서 열린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26] 또한 1992년 9월 9일에는 아이티 난민에 대한 당시 미국 정부의 단속 조치에 항의하며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다시 체포되기도 했다.[26]1988년에는 약 6년간의 연구 끝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선수의 역사를 다룬 3권짜리 책 ''A Hard Road to Glory: A History of the African-American Athlete''를 출판했다.[27] 애시는 이 책이 자신이 획득한 어떤 테니스 타이틀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29]
자신이 HIV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알린 후, 애시는 에이즈 퇴치를 위한 아서 애시 재단(Arthur Ashe Foundation for the Defeat of AIDS)을 설립했다. 이를 통해 바이러스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성교육과 안전한 성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감염 경로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 HIV가 동성애자, 양성애자 남성 또는 정맥 주사 약물 사용자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여 사회적 편견을 바로잡으려 노력했다.[33] 1992년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에는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며 에이즈에 대한 인식 개선과 연구 기금 증액의 시급함을 역설했다.[33] 그는 "우리는 돌아보며 모든 관계자들에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 필요한 모든 자원을 가지고 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호소했다.[33]
사망 두 달 전에는 도시 지역의 열악한 의료 서비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서 애시 도시 보건 연구소(Arthur Ashe Institute for Urban Health)를 설립했다.[26] 또한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회고록 ''데이스 오브 그레이스'' 집필에 몰두하여,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원고를 완성했다.[26]
5. 2. 저술 활동
1974년, 리처드 B. 톰슨과 함께 스포츠계 최초의 교육용 장음반 중 하나인 "Learn Tennis with Arthur Ashe. For Beginners and Advanced Players"를 공동 제작하여 발매했다.[41] 은퇴 후에는 ''타임'' 잡지와 ''워싱턴 포스트''에도 글을 기고했다.1988년, 약 6년간 연구팀과 함께 작업한 끝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선수의 역사를 다룬 3권짜리 책 ''A Hard Road to Glory: A History of the African-American Athlete''를 출간했다.[27] 애시는 이 책이 자신이 획득한 어떤 테니스 타이틀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29]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회고록 ''데이스 오브 그레이스'' 집필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사망하기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원고를 완성했다.
5. 3. 기타 활동

은퇴 후 애시는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다. ''타임'' 잡지와 ''워싱턴 포스트''에 글을 기고했으며, 1980년대 초부터 사망 몇 달 전까지 ABC 스포츠와 HBO에서 해설가로 활동했다. 또한, 전국 주니어 테니스 리그를 설립하고,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 데이비스컵 팀의 주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85년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6]
애시는 활발한 시민권 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인종 통합 문제와 정치적 변화를 직접 관찰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한 31명의 저명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표단 중 한 명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며, 1985년 1월 11일에는 워싱턴 D.C. 주재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관 밖에서 열린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집회에 참여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또한 1992년 9월 9일에는 아이티 난민에 대한 당시 미국 정부의 단속 조치에 항의하며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다시 체포되었다.
1988년, 애시는 약 6년간의 연구 끝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선수의 역사를 다룬 3권짜리 책 ''A Hard Road to Glory: A History of the African-American Athlete''를 출판했다.[27] 애시는 이 책의 완성을 어떤 테니스 대회 우승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29]
자신이 HIV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알린 후, 애시는 에이즈 퇴치를 위한 아서 애시 재단을 설립했다. 이를 통해 에이즈 바이러스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성교육과 안전한 성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육 활동을 펼쳤다. 그는 자신의 진단과 관련된 질문에 답하며, HIV 감염이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남성, 혹은 정맥 주사 약물 사용자에게만 국한된 위험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바로잡으려 노력했다.[33] 1992년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에는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며 에이즈에 대한 인식 개선과 연구 자금 증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망하기 두 달 전에는 열악한 의료 서비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서 애시 도시 보건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같은 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잡지의 올해의 스포츠맨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회고록 ''데이스 오브 그레이스'' 집필에 몰두하여, 사망하기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원고를 완성했다.
1974년에는 리처드 B. 톰슨과 함께 스포츠계 최초의 교육용 장음반 중 하나인 "Learn Tennis with Arthur Ashe. For Beginners and Advanced Players"를 공동 제작하여 발매했다.[41]
6. 개인사
1977년 사진작가 잔느 무투사미와 결혼했으며, 딸 카메라는 입양했다. 애시는 일찍부터 심장 질환을 앓았는데, 1979년 7월 36세의 나이에 첫 심장 발작을 겪었다. 병세가 악화되어, 1988년에 심장 수술을 받았지만, 그때 실시된 수혈의 영향으로 HIV에 감염되었다. 같은 해 톡소플라스마증 진단을 받기도 했다. 1992년에 애시는 HIV 감염 사실을 공표하고, 말년에는 AIDS와의 싸움에서도 앞장섰지만, 1993년 2월 6일에 AIDS 관련 합병증인 폐렴으로 49세의 생을 마감했다.
7. 유산과 업적
은퇴 후 애시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영향력을 이어갔다. ''타임''과 ''워싱턴 포스트''에 글을 기고하고, ABC 스포츠와 HBO에서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전국 주니어 테니스 리그를 설립했다. 또한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 데이비스컵 팀 주장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5년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6]
애시는 선수 시절부터 이어온 사회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은퇴 후에도 꾸준히 보여주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했으며, 1985년 워싱턴 D.C.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관 앞에서 열린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1992년에는 미국 정부의 아이티 난민에 대한 강경 조치에 항의하며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다시 체포되는 등, 인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그는 저술 활동에도 힘썼는데, 특히 1988년에 출판한 3권짜리 저서 ''A Hard Road to Glory: A History of the African-American Athlete''는 약 6년간의 연구 끝에 완성한 역작이다.[27] 애시 스스로 이 책의 완성을 어떤 테니스 대회 우승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을 만큼[29],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선수들의 역사를 조명하는 데 큰 의미를 두었다.
1992년, 애시는 자신이 HIV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공개하며 에이즈(AIDS)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맞섰다. 그는 에이즈 퇴치를 위한 아서 애시 재단(Arthur Ashe Foundation for the Defeat of AIDS)을 설립하여 바이러스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성교육과 안전한 성관계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헌신했다. 특히 에이즈가 특정 집단에게만 해당된다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으려 노력했으며,[33] 1992년 세계 에이즈의 날에는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에이즈 연구 기금 확충과 인식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사회 문제 해결에 힘썼다. 사망 두 달 전에는 도시 지역의 열악한 의료 서비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서 애시 도시 보건 연구소(Arthur Ashe Institute for Urban Health)를 설립했으며, 같은 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그를 올해의 스포츠맨으로 선정했다. 사망하기 일주일 전 완성된 그의 회고록 ''데이스 오브 그레이스''(Days of Grace)는 그의 삶과 신념을 담담하게 기록했다.
아서 애시는 윔블던, US 오픈, 호주 오픈 남자 단식에서 모두 우승한 유일한 흑인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그랜드 슬램 남자 단식 타이틀을 획득한 아프리카계 흑인 선수는 애시와 1983년 프랑스 오픈 우승자 얀닉 노아 두 명뿐이다.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 잭 크레이머는 1979년 자신의 저서에서 애시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21명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40]
애시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기념 사업이 이루어졌다. US 오픈의 메인 경기장은 그의 이름을 딴 아서 애시 스타디움으로 명명되었으며, 그의 고향 리치먼드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지고[51] 도로 이름이 '아서 애시 불러바드'로 변경되었다.[56] 모교 UCLA에는 아서 애시 학생 건강 및 웰니스 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또한 ESPN은 역경 속 용기를 보여준 스포츠인에게 '아서 애시 용기상'을 수여하고 있으며, 그의 인도주의적 공헌을 기리는 다양한 상과 장학금이 제정되었다. 1993년에는 사후 자유 훈장이 추서되었다.[48] 애시는 성실한 인품과 스포츠맨십으로 테니스계의 존경을 받았으며, 코트 안팎에서 보여준 그의 용기와 헌신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44]
7. 1. 테니스계 업적
아서 애시는 1961년 동부 클레이 코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1963년에는 미국 데이비스컵 팀에 선발된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되었고, 같은 해 태평양 남서부 선수권 대회에서도 우승했다. 1965년에는 NCAA 단식 및 복식 타이틀을 획득하며 모교 UCLA의 단체전 우승을 이끌었다.초기 그랜드 슬램 대회에서는 1966년과 1967년 호주 선수권 대회 결승에 진출했으나 로이 엠머슨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1967년에는 미국 남자 클레이 코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1968년은 애시에게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는 미국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와 오픈 시대 첫 해의 US 오픈에서 모두 우승했다. 이로써 그는 US 오픈 남자 단식에서 우승한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아마추어 선수권과 오픈 대회를 동시에 석권한 유일한 선수로 기록되었다.[18] 당시 그는 미국 육군 중위 신분이었고 데이비스 컵 출전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아마추어 신분을 유지해야 했다. 이 때문에 US 오픈 우승 상금 1.4만달러를 받지 못했고, 상금은 준우승자 톰 오커에게 돌아갔다.[19] 애시는 우승에 대한 대가로 하루 20USD의 경비만 받았다. 같은 해 12월, 애시는 미국팀의 데이비스컵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9년에도 애시는 미국팀의 데이비스컵 2연패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이유로 애시의 남아프리카 오픈 참가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애시는 이후에도 계속 비자를 신청하며 남아공의 인종 차별 정책에 항의했고, 이는 1970년 남아공이 데이비스컵 대회에서 제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 1월, 애시는 호주 오픈에서 우승하며 두 번째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획득했다. 결승에서 딕 크리리를 꺾고 1959년 이후 처음으로 비(非)호주인 우승자가 되었다. 그해 9월 미국팀의 데이비스컵 3연패에 기여한 후, 애시는 월드 챔피언십 테니스(WCT)와 계약하며 프로 선수로 전향했다.[21]
프로 전향 후에도 애시는 꾸준히 활약했다. 1971년 호주 오픈에서는 켄 로즈월에게 패해 준우승했지만, 같은 해 프랑스 오픈 남자 복식에서는 마티 리센과 함께 우승했다. 1972년에는 국제 테니스 연맹(ILTF)과 WCT 간의 분쟁으로 인해 프랑스 오픈과 윔블던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해 US 오픈 결승에서는 일리에 너스타세에게 5세트 접전 끝에 패배했다. 이 시기 애시는 선수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테니스 선수 협회(ATP) 설립을 지지했고, 1974년에는 ATP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73년, 애시는 ATP 회장으로서 니콜라 필리치의 출전 정지 징계에 항의하며 윔블던 보이콧을 주도했다. 이 보이콧은 프로 선수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22] 같은 해 11월, 그는 마침내 남아공 오픈 참가 비자를 받아 처음으로 남아공에서 경기를 치렀고, 단식에서는 지미 코너스에게 패해 준우승했지만 복식에서는 우승했다.
1975년은 애시의 선수 경력에서 또 다른 정점이었다. 5월에는 댈러스에서 열린 시즌 최종전 WCT 파이널에서 비외른 보리를 꺾고 우승했다. 그리고 7월 5일, 윔블던 결승에서 당시 압도적인 우승 후보이자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지미 코너스를 4세트 만에 꺾고 생애 첫 윔블던 타이틀이자 세 번째 그랜드 슬램 단식 우승을 차지했다.[24][25] 당시 두 선수 간에는 코너스가 애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등으로 인해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애시는 이 우승으로 1만파운드의 상금을 받았다.
애시는 이후 몇 년 더 선수 생활을 이어가 1977년 1월 토니 로치와 함께 호주 오픈 복식에서 우승했지만, 발뒤꿈치 부상과 수술로 인해 잠시 랭킹이 하락하기도 했다. 1979년 심장 수술을 받은 후, 1980년 4월 16일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통산 전적은 818승 260패, 51개의 단식 타이틀이다.
은퇴 후에도 애시는 테니스계에 기여했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 데이비스컵 팀 주장을 맡았으며, 1985년에는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6]
아서 애시는 윔블던, US 오픈, 호주 오픈 남자 단식에서 모두 우승한 유일한 흑인 선수로 남아 있다. 그랜드 슬램 남자 단식 타이틀을 획득한 아프리카계 흑인 선수는 애시와 1983년 프랑스 오픈 우승자 얀닉 노아 두 명뿐이다. 그는 또한 1968년부터 1970년까지 3년 연속 데이비스컵에서 미국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설적인 선수이자 테니스 해설가인 잭 크레이머는 1979년 자신의 저서에서 애시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21명 중 한 명으로 꼽았다.[40]
7. 2. 사회적 영향
아서 애시는 선수 시절부터 은퇴 후까지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목소리를 냈다.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대한 반대 운동과 에이즈(AIDS)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1969년, 애시는 남아프리카 공개 테니스 선수권 대회 참가를 위해 비자를 신청했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고수하던 남아프리카 정부로부터 거부당했다.[21] 이후 몇 년간 비자 신청을 계속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자, 애시는 이를 계기로 미국 정부에 남아프리카에 대한 경제 제재를 촉구하고, 국제 테니스 연맹(ILTF)에 남아프리카의 회원 자격 박탈을 요구했다. 다만 초기에는 남아프리카 선수들과의 경기를 거부하라는 다른 활동가들의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970년 3월, 애시에 대한 비자 발급 거부가 중요한 계기가 되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데이비스컵 대회에서 제명되었다.[21]
1973년 11월, 남아프리카 정부가 올림픽 참가 금지 조치를 해제하고 국제 스포츠계 복귀를 시도하면서 애시는 처음으로 비자를 발급받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오픈에 참가했다. 그는 자신의 참가가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통합의 긍정적인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남아프리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단식 결승에서 지미 코너스에게 패했지만, 복식에서는 톰 오커와 함께 우승했다. 1974년에도 단식 결승에 진출했으나 다시 코너스에게 패했다.
그러나 1977년, 애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테니스 경기 티켓을 구매하려는 젊은 흑인들이 "흑인 전용" 창구를 이용하라는 말을 듣는 것을 목격한 후, 자신의 이전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남아프리카 선수들에 대한 보이콧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23] 그는 언론을 통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프로 테니스 서킷과 데이비스컵 대회에서 완전히 제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985년 1월 11일에는 워싱턴 D.C. 주재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관 앞에서 열린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애시는 아파르트헤이트 문제 외에도 다른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1992년 9월 9일에는 미국 정부의 아이티 난민에 대한 강경한 단속 조치에 항의하며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다시 체포되었다.
은퇴 후 애시는 저술 활동에도 힘썼다. 1988년에는 약 6년간의 연구 끝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선수들의 역사를 다룬 3권짜리 대작 ''A Hard Road to Glory: A History of the African-American Athlete''를 출판했다.[27] 애시 자신은 이 책의 완성을 어떤 테니스 대회 우승보다 더 중요한 성취로 여겼다.[29]
1988년 심장 수술 중 수혈로 인해 HIV에 감염된 사실을 알게 된 애시는, 1992년 이 사실을 대중에게 공개하며 에이즈 퇴치 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에이즈 퇴치를 위한 아서 애시 재단(Arthur Ashe Foundation for the Defeat of AIDS)을 설립하여 바이러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고, 성교육과 안전한 성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에이즈가 동성애자나 약물 사용자 등 특정 집단에게만 해당된다는 사회적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33] 1992년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에는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며 에이즈에 대한 인식 개선과 연구 기금 확충의 시급성을 역설했다.
사망하기 두 달 전에는 도시 지역의 열악한 의료 서비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서 애시 도시 보건 연구소(Arthur Ashe Institute for Urban Health)를 설립하는 등 생의 마지막까지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그를 올해의 스포츠맨으로 선정했으며, 1993년에는 사후 자유 훈장이 추서되었다.[48] 그의 회고록 ''데이스 오브 그레이스''(Days of Grace)는 사망하기 불과 일주일 전에 완성되었다.
7. 3. 기념 시설
- 리치먼드 아서 애시 체육 센터: 1982년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6,000석 규모의 다목적 시설로 건립되어 지역 스포츠 행사와 콘서트를 개최한다.
- 리치먼드 아서 애시 동상: 1996년 리치먼드시는 조각가 폴 디파스퀄레가 제작한 아서 애시 동상을 기념비 거리에 세워 그의 삶을 기렸다.[51] 이 거리는 전통적으로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남부 연합의 주요 인물들의 동상을 위한 장소였기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자 인권 운동가였던 애시의 동상을 세우는 결정은 도시 내에서 약간의 논란을 일으켰다.[52]
- 아서 애시 스타디움: US 오픈이 열리는 뉴욕 플러싱 메도우 파크의 USTA 전국 테니스 센터 메인 경기장은 1997년 그의 공적을 기려 '아서 애시 스타디움'으로 명명되었다. 최대 수용 인원 2만 5천 명 규모의 세계 최대 테니스 전용 경기장으로, 개장식에서는 존 매켄로가 "그는 위대한 테니스 대사였다"는 연설을 했다. 매년 아서 애시 키즈 데이(Arthur Ashe Kids' Day)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 아서 애시 학생 건강 및 웰니스 센터: 애시의 모교인 UCLA 캠퍼스 내 학생 건강 센터는 그의 이름을 따서 1997년 문을 열었다.
- 아서 애시 불러바드: 2019년 6월 22일,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시는 기존의 불러바드(Boulevard)를 아서 애시 불러바드(Arthur Ashe Boulevard)로 공식 개명했다.[56]
- 기타:
- 필라델피아에는 아서 애시 유소년 테니스 및 교육 센터(Arthur Ashe Youth Tennis and Education Center, 현 레거시 유소년 테니스 및 교육 센터)가 있다.
- 2005년 미국 우편청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 사진을 사용한 아서 애시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 ESPN의 연례 스포츠 시상식인 ESPY 어워드에서는 역경 속에서 용기를 보여준 스포츠계 인물에게 '아서 애시 용기상'(Arthur Ashe Courage Award)을 수여한다.
- 다이버스: 고등 교육 이슈(Diverse: Issues In Higher Education)는 학업과 운동 모두에서 뛰어난 유색 인종 학생 선수들을 기리는 '아서 애시 주니어 스포츠 장학금'(Arthur Ashe Jr. Sports Scholars Awards)을 후원한다.[57]
8. 수상 및 영예
아서 애시는 선수 시절 뛰어난 업적과 은퇴 후 사회 공헌 활동으로 수많은 상과 영예를 안았다.
연도 | 내용 | 비고 |
---|---|---|
1974년 | 교육용 음반 "Learn Tennis with Arthur Ashe. For Beginners and Advanced Players" 발매[41] | 리처드 B. 톰슨과 공동 제작 |
1975년 | ATP 올해의 선수상 수상 | 제1회 수상자 |
1975년 | BBC 해외 스포츠 올해의 인물상 수상[42] | |
1977년 | ATP 페어플레이상 수상[43] | 동료 선수 투표 |
1979년 | ATP 컴백 플레이어 오브 더 이어 상 수상 | |
1979년 | 버지니아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44] | 명예의 전당 측은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가함. |
1983년 | 대학 테니스 협회 명예의 전당 헌액[45] | |
1985년 |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 헌액[26] | |
1986년 | 스포츠 에미상 수상[46] | 다큐멘터리 "A Hard Road to Glory" 공동 집필 |
1991년 | 윌리엄 앤드 메리 칼리지 명예 인문학 박사 학위[47] | |
1992년 | 미국 스포츠캐스터 협회 "스포츠 레전드" 상 수상 | |
1993년 | 대통령 자유 훈장 추서[48] | 빌 클린턴 대통령 수여 (사후) |
1993년 | 미 의회 흑인 의원 연합 재단 조지 토마스 "미키" 렐랜드 상 수상[49] | (사후) |
1993년 | ATP 아서 애시 인도주의자상 수상 | ATP가 그의 인도주의적 공헌을 기려 제정, 사후 첫 수상자로 선정됨. |
1993년 | 제퍼슨 공익 봉사상 수상[50] | 불우 이웃 위한 공익 봉사 부문 (사후) |
2002년 | 몰레피 케테 아산테 선정 100대 아프리카계 미국인 포함[54] | |
2005년 | 미국 우편청 기념 우표 발행 |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 이미지 사용 |
2005년 | 테니스 매거진 선정 테니스 시대 40대 최고 선수 30위[55] |
'''아서 애시의 이름을 딴 장소 및 상'''
- 아서 애시 경기장 (1982년,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6,000석 규모의 다목적 경기장.
- 아서 애시 스타디움 (1997년, 뉴욕 퀸스 플러싱 메도스 코로나 파크): US 오픈 메인 스타디움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테니스 전용 경기장이다. 매년 '아서 애시 키즈 데이'가 열린다.
- ESPY 어워드 아서 애시 용기상: 역경에 맞서 용기를 보여준 스포츠계 인물에게 수여되는 상.
- 레거시 유소년 테니스 및 교육 센터 (필라델피아): 이전 명칭은 '아서 애시 유소년 테니스 및 교육 센터'였다.
- 아서 애시 학생 건강 및 웰니스 센터 (1997년, UCLA): 애시의 모교인 UCLA 캠퍼스 내 학생 건강 센터.
- 아서 애시 불러바드 (2019년,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기존 불러바드의 명칭을 변경하여 애시를 기렸다.[56]
- 아서 애시 주니어 스포츠 장학금: '다이버스: 고등 교육 이슈'에서 후원하며, 학업과 운동 모두 뛰어난 유색 인종 학생 선수에게 수여된다.[57]
'''기타 영예'''
참조
[1]
웹사이트
Arthur Ashe: Career match record
https://app.thetenni[...]
Tennis Base
2021-09-22
[2]
웹사이트
Aurthur Ashe bio at ESPN
https://www.espn.com[...]
2014-08-06
[3]
뉴스
The Times (London)
The Times (London)
1975-12-30
[4]
서적
La Fabuleuse Histoire du Tennis
Nathan
1989
[5]
서적
World Of Tennis
https://archive.org/[...]
Collins Willow
[6]
뉴스
Ashe replaces Connor in magazine rankings
https://www.newspape[...]
The Morning Call
1975-12-09
[7]
뉴스
Rankings Dept.
https://www.newspape[...]
The Journal Herald
1976-01-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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